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법정 저>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법정 스님 법문집 시리즈 ㅣ 법정 저 ㅣ 문학의숲



하나 속에 모두가 있고 모두 속에 하나가 있다


사람들은 번뇌 속에서 살아간다. 이 책은 번뇌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법정 스님의 법문을 모은 것으로 시간 순으로 싣되 가장 최근 것이 앞에 오도록 했다. 삶이란 거대한 나무에 잠시 내려왔다가 떠나가는 무수히 많은 존재들에게 건네는 스님의 한 마디는 맑은 소리가 되어 깊이 울린다.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진리를 전해주는 법정 스님의 법문은 오늘도 번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영혼을 깨운다.


“자기로부터 출발해 세상과 타인에게 도달하라.”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하고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한 삶,
그것이 진정한 깨달음이자 진리의 세계이다.
법정 스님 법문집 완결편 출간

절에서는 높은 스님에게 법문을 청할 때 [청법가請法歌]를 부른다. 말 그대로 ‘법(진리쪽)을 청하는 노래’로, ‘덕 높으신 스승님, 사자좌에 오르사 사자후를 합소서. 감로법을 주소서.’로 시작한다. 법정 스님은 이 노래에 대해 한 법회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청법가의 ‘거룩하고 덕 높은’이라는 가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낯이 간지럽다. 사자후는 부처님의 설법을 가리킨다. 사자가 온 짐승들을 제압하듯이 부처님의 설법이 중생들의 번뇌를 제거해 준다는 뜻이다. 또한 감로법은 불사와 영생에 이르는 진리이다. 그렇기에 실제로는 덕이 높지 못한 내가 법문 시작 전 이 노래를 들을 때면 마음이 편치 못하다.”(260쪽)
그렇다면 그 사자후와 감로법은 어디에서 들을 수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스님은 꽃에게서 들으라고 말한다. “귀 기울여 들으면 이 우주 만물 중에 법문을 설하지 않는 것은 없다. 꽃과 나무가, 바람과 풀벌레가, 무상 속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수많은 생명과 현상들이 매 순간 우리에게 진리를 설하고 있다. 귓속의 귀로 들으면 들린다.”(5쪽) 스님은 가끔 법문 끝을 이렇게 마무리 짓곤 한다. “나머지 이야기는 피어나는 저 나무와 꽃들에게서 들으라.”
지난봄 출간된 첫 번째 법문집 [일기일회一期一會]에 이은 두 번째 법문집이자 법정 스님 법문집의 완결편인 이 책의 제목은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이다.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하나는 모두이며 모두는 곧 하나라는 가르침이다. 저마다 피어나는 하나하나에는 전체가 담겨 있으며, 그 하나하나가 모여 전체를 이룬다. 홀로 오두막에 계신 스님은 우리가 비록 시간적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우리는 서로 기대고 받쳐 주고 있는 존재임을 느낀다고 말한다. 세상에 단 한 사람으로서 초대받은 우리는 서로에게 복밭이자 선지식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큰 생명에서 나온 존재들이며, 남이란 타인이 아니라 또 다른 나이다.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한 삶이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이고 진리의 세계이다.

우리는 서로 기대고 받쳐 주는 존재, 타인은 나의 복밭이자 선지식이다.
국가와 사회, 기업과 조직, 지역과 수행공동체, 그리고 하나의 자연인이자 전체의 일원인 각 개인에게 전하는 우리 시대의 영적 스승 법정 스님의 메시지

좋아하는 영어 문장에 ‘One for All, All for One’이란 말이 있다.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하고,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한다는 뜻이다. 같은 의미로 [화엄경] 법성게에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이란 말이 있다.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가르침이다.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하고,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곧 진정한 깨달음이고 진리의 세계이다.(153~154쪽)

법정 스님은 “나 자신만을 위해 수행한다면 그것은 반쪽인 수행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타인에 대한 보살핌이 동시에 따라야 한다.”(89쪽)고 2002년 12월 법문에서 이야기했다. “자기 자신이란 독립된 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 관계 속에 얽혀 있다.”며, 스님은 안팎으로 수행한 뒤에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자비를 통해 지혜를 이웃과 나누는 것”이라고 말한다. 깨달음의 궁극은 자기로부터 시작해 세상과 타인에게 도달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우리의 본마음에는 지혜와 ...자비의 요소가 함께 갖추어져 있다. 깨달음은 여기 이 찻잔의 손잡이를 들어 올리는 것과 같다. 손잡이를 들어 올리면 찻잔도 들어 올려진다. 지혜라는 손잡이를 들어 올리면 자비의 마음 역시 세상에 드러난다. 어느 것이 손잡이이고 찻잔인가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자기완성과 형성을 위해 피나는 정진을 한 끝에 마침내 눈을 떴을 때 할 일이 무엇인가? 그 경지를 존재계 전체와 함께 나누는 일이다. 그것이 나눔이고 인간 존재에 대한 배려이다.(89~90쪽)

하나의 존재는 생명의 바다 위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처럼 다른 존재들과 얽히고설켜 있다. 나라는 존재는 남과 관계를 맺고 있기에 내가 행복해지고자 한다면 먼저 남을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깨달았다고 해서 혼자 가만히 있다면 그것은 깨달은 자가 아니다. 그 향기가 바람에 날아가야 한다.”(90쪽)
법정 스님은 자비행의 대상을 인간에만 한정짓지 않는다. 법정 스님은 만나는 이웃뿐 아니라 그것이 바위가 되었든, 새가 되었든, 짐승이 되었든, 우리가 만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법문집 1권 [일기일회]에서도 말했듯 모든 순간은 생애 단 한 번뿐이며, 모든 만남은 생애 단 한 번뿐인 인연이기 때문이다.
“만남의 의미를 뜻있게 지니려면 보다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처럼 비정하고 냉혹한 세태에 우리가 사람의 자리를 잃지 않고 지키려면, 만나는 대상마다 보다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 나는 새벽예불 끝에 늘 다짐을 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보다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하겠습니다.’”(154쪽)

각자가 머무는 자리가 곧 부처님이 앉았던 보리수나무 아래,
삶이라는 나무 아래서 나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법정 스님은 우리에게 “순간순간 물음을 지녀야 함”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과연 생을 후회 없이 보내고 있는지를.(88쪽) 혹시 자기 몫의 생을 아무렇게나 소비해 버리고 있지 않은가를 되새겨 보라고 한다.
2000년 11월 뉴욕에서 있었던 초청법회에서, 스님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자리인 보리수나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나무 아래 많은 사람들이 앉았다. 마을 사람도 앉고, 힌두교 사두들도 앉고, 여행자도 앉았다. 걸인도 앉고 밤도둑도 앉았다. 그들은 그냥 그 나무 아래 앉았다가 사라졌다. 싯다르타만이 그 자리에서 궁극의 깨달음을 이루어 부처가 되었다.”(235쪽)
스님은 평범했던 한 나무가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더없이 성스런 나무가 된 것처럼, 우리가 사는 이 자리 역시 성스런 장소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맑은 마음으로 지혜와 자비를 실천하고, 비본질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본질을 회복하고 있다면 우리가 머무는 그 자리가 곧 성스런 자리라고. 그러나 스스로 지어낸 생각들에 사로잡혀 낡은 습관과 타성에 젖어 살고 있다면 그 자리는 고뇌에 찬 자리일 뿐이다.

여기 삶이라는 거대한 나무가 있다. 이 나무 아래 무수히 많은 존재들이 왔다가 떠난다. 때로는 미물의 몸으로, 때로는 동물의 몸으로, 인간의 몸으로, 여자와 남자의 몸으로, 그렇게 몸을 바꿔 가며 이 삶이라는 나무 아래 앉았다가 간다. 그대는 이 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깨닫고 가는가? 그대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사업가든 스님이든 정치인이든 배우이든 택시 운전사든, 그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깨달음을 이루는가이다. 단지 감옥에 갇혀 있다가 떠나는가, 아니면 궁극의 깨달음을 이루는가에 따라 삶은 감옥이 되기도 하고 성스런 보리수나무가 되기도 한다.(235~236쪽)

2009년 5월 부처님오신날 법문부터 1992년 약수암 초청법회 법문까지
17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35편의 맑은 법문

최초의 법문집 [일기일회]에 이어 새롭게 나온 법정 스님의 법문집 2권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에는 2009년 5월 성북동 길상사에서 부처님오신날에 행한 법문을 시작으로 2000년 뉴욕 불광사 초청법회와 1998년 원불교 서울 청운회 초청강연, 1992년 약수암 초청법회에 이르기까지 17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35편의 법문이 두툼한 분량으로 실렸다.
운수납자, 학인, 재가불자,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펼친 청량한 죽비 소리 같은 법문들이다. 법정 스님의 신간이 나올 때마다 빠짐없이 찾아 읽는 진지한 독자들이 많아 첫 번째 법문집은 출간 석 달 만에 10만 부가 넘게 판매되었다.(2009년 11월 10일 현재 13만부 판매쪽) 그리고 두 번째 법문집의 출간을 문의하는 전화가 많아 편집부가 일하는 데 지장을 받았을 정도였다.
“시공간의 제약으로 직접 법회에 참석해 법문을 들을 수 없었던 이들을 위해 이 법문집을 엮어 세상에 펴낸다.”고 엮은이들은 말한다. 하지만 매 계절 눈과 비바람 속에서도 어김없이 설해지던 법문은 지난 5월 부처님오신날 법문을 끝으로 중단되었다. 법문을 엮은 상좌스님들과 류시화 시인에 따르면 스님이 병중이기도 하지만, 한동안 강원도 오두막에 머물며 세상에 내려오지 않고 침묵하기로 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은둔이 깊어져 가고 있다.

진정한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 누구에게나 출가가 필요하다.
“낡은 집착과 타성의 집에서 훨훨 떨치고 나오라.”

이번 법문집에 흐르는 또 하나의 가르침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모든 현상과 결과에 내재된 근본적인 인因과 연緣의 관계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내가 뿌린 원인의 거둠이며, 원인이 사라지면 결과도 사라진다. 따라서 슬퍼하거나 타인과 상황을 탓할 이유가 없다.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음을 깨닫고 짐을 내려놓는 것이 곧 ‘출가 정신’이라고 법정 스님은 말한다. 이 법문집에서 꽤 긴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내용이 ‘출가’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2003년 10월의 법문은 ‘지금 출가를 꿈꾸는 그대에게’가 제목이다. 출가는 ‘집을 나온다’는 뜻이다.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집착과 타성의 집에서 훨훨 떨치고 나오는 것을 출가라고 한다. 스님은 가출과 출가의 차이를 말한다.
“출가는 자기 의지와 선택에 따라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삶의 궤도를 수정하기 위해 나오는 것이고, 가출은 여러 가지로 상황이 좋지 않아 마지못해 집을 떠나오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없어서 보다 자기다운, 보다 꽃다운, 보다 인간다운 삶은 없을까 찾게 되는 것이 바로 출가 정신이다.”(47쪽)
생과 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출가 정신이다. 출가란 모든 집착과 얽힘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법정 스님은 이것이 수행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진정한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 누구에게나 출가 정신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면 삶을 변화시켜 낡은 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새로운 업을 지어야 한다고 그는 요구한다.
크게 버리는 자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 전부를 버리지 않고서는 전체를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는가? 스님에 따르면 그것은 “비본질적인 자기를 벗어 버리고 본질적인 자기를 발견하는 것. 비본질적인 옷들을 벗어 던지고 그것에 가려져 있던 본질의 나를 되찾는 것.”(54쪽)이다.

인간이라고 불리는 우리 존재만이 아니라 동물, 곤충, 새들도 늙음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아무리 간절히 원한다한들,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원하는 상태로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는 그런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큰 괴로움과 불만족의 원인이 된다. 그런데 이 불만족은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도 한다. 존재의 한계를 알게 되면 진정한 추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53쪽)

그렇다면 법정 스님 자신은 왜 출가를 했는가? 스님은 말한다.

“나 자신은 왜 출가했는가? 무슨 이유로 세속을 떠났는가? 부처님이 지금 이 자리에서 물으면 나는 이렇게 분명하게 대답할 것이다. 나답게 살기 위해서, 내 식대로 살기 위해서 집을 떠났노라고. 솔직히 말해 나는 불교의 진리에 매혹되어서 집을 떠난 것이 아니다. 나의 출가는, 나의 존재의 절실한 요구였다. 때가 되었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나를 그 길로 이끈 것이다. 자기답게 살려는 사람이 자기답게 살고 있을 때는 환희심으로 충만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고통과 번뇌가 따른다. 자기 몫의 생을 아무렇게나 소비해 버릴 수는 없는 까닭에 나는 출가를 결심했다.”(55~56쪽)

모든 것은 변화한다. 그 움직임 속에 항상 깨어 있으라.

법정 스님이 [무소유] [버리고 떠나기] [산에는 꽃이 피네]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그리고 지난해에 펴낸 [아름다운 마무리] 등의 산문집을 통해 무소유의 자유로움, 홀로 있음과 침묵의 세계를 말해 왔다면, 두 권의 법문집 [일기일회]와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에서는 세상을 깨어 있는 구도자의 자세로 살아갈 것을 더욱 강력하게 요구한다. 스님은 “지구가 잠든 순간에도 깨어 있으라.”고 말한다.
마음에는 두 가지 마음이 있다고 스님은 지적한다. ‘맑은 마음’과 ‘물든 마음’이 그것이다. 맑은 마음은 우리 본래의 마음이고, 물든 마음은 번뇌로 가려진 마음, 분별로 얼룩진 마음이다. 깨어 있음은 ‘물든 마음’에서 ‘맑은 마음’으로 전환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수행의 목표이다. 그 깨어 있음은 ‘나’라는 에고와 관념으로부터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 스님은 말한다. “과거로부터, ‘나’의 모든 생각으로부터 기꺼이 죽을 수 있어야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 죽기 전에 죽어야 한다.”(25쪽)

많은 사람들이 삶에서 고통과 불만족을 느낀다.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는 사람들도 조금만 내면을 들추면 고통과 불만족에 찬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그들은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고 세상에 있다고 하지만, 실상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 어떤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란 사실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상함의 진리에 대한 자각은 자유를 가져다준다. 이제 어떤 짐도 지고 있을 이유가 없다.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27쪽)

“우리가 이 몸을 버리고 가는 것만이 죽는 것은 아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살았다가 그 생각의 사라짐과 함께 죽고, 다음 생각으로 다시 살아난다.”(25쪽)

이러한 깨달음은 무상함의 원리를 인식하는 데서 비롯된다. 옷에 달린 단추에서부터 사랑이라는 숭고한 가치에 이르기까지 변화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는 무상함이라는 존재의 기반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

법정 스님은 2006년 12월에 설한 법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은 무상하며, 변화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불변의 진리이다. 현상들은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존재의 본성이다.”(26쪽)
스님은 순간순간 깨어 있어서, 다른 망상에 얽매이지 말라고 말한다.

덧없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한때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주의 실상이다. 변하지 않는 것, 그것은 죽음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한시도,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다. 모든 것은 움직임이다. 이것을 한편으로 보면 허망하고 덧없다고 말하는데,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 변화 속에서, 무상함 속에서,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늘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129쪽)




목차

법정 스님 법문집 두 번째 권을 펴내며

부처님 옷자락을 붙잡아도 _ 2009년 5월 2일 부처님오신날
소욕지족 소병소뇌少欲之足 少病少惱 _ 2007년 8월 27일 여름안거 해제
마음속 금강보좌에 앉으라 _ 2006년 12월 5일 겨울안거 결제
영원한 것 없으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_ 2006년 8월 8일 여름안거 해제
봄날의 행복론·1 _ 2006년 4월 16일 봄 정기법회
지금 출가를 꿈꾸는 그대에게 _ 2003년 10월 5일 불교문화강좌
봄날의 행복론·2 _ 2003년 4월 20일 봄 정기법회
때로 높은 봉우리 위에, 때로 깊은 바다 밑에 _ 2003년 2월 16일 겨울안거 해제
빚지고 사는 삶인가, 빚 갚고 사는 삶인가 _ 2002년 12월 15일 길상사 창건 5주년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_ 2002년 11월 19일 겨울안거 결제
한평생 몇 번이나 둥근달을 볼까 _ 2002년 10월 27일 뉴욕 불광사 초청법회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멈춘다면 _ 2002년 10월 20일 10월 정기법회
하루를 기도로 열고 기도로 닫으라 _ 2002년 8월 23일 여름안거 해제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 속에 있다 _ 2002년 6월 16일 6월 정기법회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 _ 2002년 5월 19일 부처님오신날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_ 2002년 2월 17일 2월 정기법회
길에서 검객을 만나거든 너의 검을 보여 주고 _ 2001년 12월 16일 길상사 창건 4주년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_ 2001년 11월 4일 뉴욕 불광사 초청법회
그대의 가풍은 무엇인가 _ 2001년 8월 19일 8월 정기법회
물은 낮은 데로 흘러 세상을 적신다 _ 2001년 6월 17일 6월 정기법회
영혼에는 나이가 없다 _ 2001년 5월 8일 여름안거 결제
문명의 소도구로 전락하지 말라 _ 2001년 2월 18일 2월 정기법회
허술하게 이은 지붕에 비가 새듯이 _ 2001년 1월 19일 일요 가족법회
영혼을 깨우는 벗을 찾으라 _ 2000년 12월 17일 길상사 창건 3주년
나무 위에 사는 선승의 가르침 _ 2000년 11월 19일 뉴욕 불광사 초청법회
미국에 와서 아메리카 인디언을 말하다 _ 2000년 11월 17일 뉴욕 불광사 초청법회
큰 연못과 작은 연못 _ 2000년 11월 10일 겨울안거 결제
부처와 함께 자고 부처와 함께 일어난다 _ 2000년 8월 14일 여름안거 해제
믿을 만한 제자가 누구인가 _ 2000년 4월 16일 봄 정기법회
지금이 바로 그때 _ 1999년 12월 12일 길상사 창건 2주년
잎 지고 난 자리에 새 움이 돋는다 1999년 11월 1일 선화회 초청법회
지구가 잠든 순간에도 깨어 있으라 _ 1998년 9월 27일 원불교 서울 청운회 초청강연
얼굴에 낀 속기를 털어 내라 _ 1998년 6월 27일 교보문고 초청 특별강연
이 마음이 중생 노릇도 하고 부처 구실도 한다 _ 1992년 10월 1일 불교방송 초청법회
오늘 핀 꽃은 어제의 꽃이 아니다 _ 1992년 8월 28일 약수암 초청법회

용어 해설



본문중에서

우리들 마음 그대로가 법문, 온 우주가 우리에게 법문을 설하고 있다.

세상일에 휘말려서 우리 둘레에 꽃이 피는 이 가슴 벅찬 사실을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지 말라. 이것은 놀라운 신비다. 우주가 지니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활짝 열어 보이고 있다. ‘대지는 꽃으로 웃는다.’는 시구도 있다. 꽃의 피어남을 통해서 인간사도 생각해야 한다. 내가 지니고 있는 가장 아름답고 맑은 요소를 얼마만큼 꽃피우고 있는가? 얼마만큼 열어 보이고 있는가? 꽃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삶의 모습도 되돌아보아야 한다.
(/ p.36)

아름다운 세상은 먼 곳에 있지 않다. 바로 우리 곁에 있다. 우리가 볼 줄 몰라서 가까이하지 않기 때문에, 이 아름다운 세상을 놓치고 있다. 자연은 이렇게 마음껏 꽃을 피우는데, 과연 자연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떤 꽃을 피우고 있는지 거듭거듭 살필 줄 알아야 한다. 때로는 꽃 앞에서 자신의 고민도 털어놓고 세상 사는 이야기도 나누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짐이 가벼워지고 꽃한테서 많은 위로와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사물을 가까이하면 그 사물을 닮게 된다. 산에서 사는 사람은 산을 닮고, 강가에서 살면 강을 닮는다. 꽃을 가까이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꽃 같은 삶이 된다. 이것이 우주의 조화이다. 꽃이란 무엇인가?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다.
(/ p.40)

강원도의 진달래는 남쪽에서 보는 진달래 빛깔과는 다르다. 무척 곱고 짙다. 지난겨울에 내가 사는 곳은 영하 25도까지 내려갔다. 그런 추위를 겪고 핀 꽃이기 때문에 그토록 빛깔이 고운 것 같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집안 형편이 좋아서 편하게 산 사람은 마음의 꽃을 피워도 향기가 깊지 않다. 그러나 힘든 역경 속에서 온갖 시련을 딛고 일어선 이들의 마음의 꽃은 무척 선명하다. 무엇이든 유심히 살펴보면 우리들 마음 그대로가 다 법문이다. 절에 와서 듣는 이런 법문들은 시시한 소리에 불과하다. 우주 자체가 우리에게 끝없이 가르침을 주고 있다.
(/ p.189)

살아 있는 참 스승은 결코 먼 데 있지 않다. 우리 가까이에 있다. 지하철 안에서도 만날 수 있고, 시끄러운 시장 바닥에서 만날 수도 있다. 또 우리가 다니는 직장에서, 혹은 가정에서 살아 있는 참 스승을 만날 수 있다. 이와 같은 스승들은 우연히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만큼 탐구하고 열망하면서 간절히 찾았기 때문에, 메아리로서 응답한 것이다. 스승은 우리 영혼이 늘 깨어 있도록 고무시켜 준다. 진정한 스승을 만나고 싶다면 밖에서 찾지 말라. 자신의 영적인 자아 속에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라.
(/ p.222)

날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바로 이 마음, 미워했다가 좋아했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변화하는 이 마음, 이것이 바로 도이다. 도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내 일상생활의 이 마음, 이 중생심, 이 갈등, 온갖 얽히고설킨 이 마음이 도이다. 일상성을 벗어나서 우리가 기댈 것이 무엇인가? 너무 일상성에만 안주하기 때문에 자꾸 탈출하려는 마음이 생긴다고 했는데, 그 하루하루의 삶 자체가 도의 세계이다. 진리의 세계이다. 이 밖에 다른 것이 없다.
(/ pp.335~336)

무상함을 깨닫고 가장 자기다운 모습으로 되돌아가라.

부처님은 집착을 바다에서 소금물을 마시는 것에 비교한다. 더 많이 마실수록 더 목이 마르다는 것이다. 마음이 어떤 대상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히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기회를 가지고 그 집착을 충족시키든 결코 충분한 만족감을 느낄 수 없다. 그것은 곧 괴로움으로 이어진다.
(/ p.51)

깨달음이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세월 속에서 끊...임없이 가꾸고 뿌린 씨앗이, 시절인연을 만나 마침내 꽃 피어나는 것이다. 이 세상에 공것, 거저 되는 일, 우연한 일은 절대로 없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본래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 pp.314~315)

자비는 지혜의 또 다른 이름이며, 남은 나의 또 다른 모습이다.

나 자신만을 위해 수행한다면 그것은 반쪽인 수행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타인에 대한 보살핌이 동시에 따라야 한다. 흔히 ‘수행’이라고 하면 모든 관계를 끊고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자기 자신이란 무엇인가? 독립된 내가 아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관계 속에 얽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개 하면 그것은 독립된 인격이 아니라, 가족과 친구들과 이웃 간에 얽히고설킨 관계를 이루고 있다. 안팎으로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늘 명심하라.
(/ p.89)

모든 성인의 가르침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남을 도우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남에게 베푸는 것이 가장 으뜸가는 바라밀이라고 한다. 바라밀이란 ‘도달한다’는 뜻이다. 남이란 누구인가? 타인이 아니다. 크게 보면 또 다른 나이다. 남이란 내 분신이다. 나와 무연한 타인이 아니다. 열린 마음으로 보면 모두가 하나이고, 겹겹으로 닫힌 마음으로 보면 모두가 타인이다. 사람은 마음을 활짝 열고 살아야 한다. 마음을 열고 사는 사람과 닫고 사는 사람은 그것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 짐스럽고 내가 괴로우므로, 훨훨 벗어 버려야 한다. 여기 이렇게 와 있지만 우리가 금생에만 지금처럼 모인 것이 아니다. 무수한 전생부터 이렇게 모였을 것이고, 어떤 계기로 인해 또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 pp.107~108)

나 자신이 행복해지고 싶다면 먼저 남을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과 관계된 존재이다. 지금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불운이나 불행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언젠가 내가 남을 불행하게 만든 과보라고 생각하라. 그러면 남을 원망하지 않는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다 까닭이 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이것이 업의 율동이고 그 메아리다.
(/ p.240)

현대 사회에서는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가 소외되고 있다. 삶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한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이웃에게 빛이 되어 주는 일이다. 그 자신만 아름다움을 지니지 말고,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서 빛이 되라는 말이다. 메마른 들녘에 한 송이 풀꽃이 피어남으로 해서, 온 들녘에 봄 물결을 일으키지 않는가?
(/ p.264)

삶은 빛나는 것은 죽음이 받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잘 산 사람만이 잘 죽을 수가 있다. 사람은 살 줄 알아야 한다. 살 줄 알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고, 살 줄 모르면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산다 하더라도 죽은 것과 다르지 않다. 언제 어디서 그때를 맞이할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한 번뿐인 생을 후회 없이 살 수 있어야 한다.
(/ p.302)

사람은 언젠가는 홀로 빈방에 남게 된다. 살 만큼 살다가 몸이 굳어지면 그곳이 관 속이든 무덤 속이든 빈 공간에 홀로 남는다. 그때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을 수가 없다. 무엇인가 부장품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미리부터 빈방에 홀로 있는 순수한 자기 존재의 시간을 가져 보라. 이런 훈련을 통해서 이다음에 홀로 있더라도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된다.
(/ p.317)

죽음은 삶의 또 다른 모습이다. 죽음을 기분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라. 모든 열매에 씨앗이 박혀 있듯이, 삶 속에는 죽음이 씨앗처럼 박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자각하라는 것이다. 자기 삶을 빛내기 위해서 죽음도 자각하라는 것이다. 그 뒷면인 그늘도 자각하라는 것이다. 그늘이 없는 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삶의 그늘은 죽음이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이 삶을 떠받쳐 주고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삶에 대해서만 생각하지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겁쟁이들이 죽음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순간순간을 알차게 살고 있기에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여가가 없기 때문이다. 항상 맑은 정신으로, 자신을 고집하는 편견을 버리고 세상을 텅 빈 것으로 보라. 이처럼 세계를 보는 사람은 죽음의 왕도 볼 수 없다.
(/ p.349)








법정[저]


이 시대의 정신적 스승 법정 스님은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경험하고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하다가 대학 재학 중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선다. 1954년 오대산의 절을 향해 떠났지만 눈이 많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로 올라와 선학원에서 당대의 선승 효봉 스님을 만나 대화를 나눈 뒤 그 자리에서 삭발하고 출가했다. 다음 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행자 생활을 했으며, 사미계를 받은 후 지리산 쌍계사 탑전으로 가서 스승뭄래사시고 정진했다. 그 후 해인사 선원과 강원에서 수행자의 기초를 다지다가 28세 되던 해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받는다.

서울 봉은사에서 운허 스님과 더불어 불교 경전 번역 일을 하던 중 함석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1975년 본래의 수행승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상에 명성이 알려지자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제자들에게조차 거처를 알리지 않고 강원도 산골 오두막, 문명의 도구가 없는 곳에서 혼자 살아왔다. 대표 산문집 [무소유]는 그 단어가 단순히 국어사전에 있는 사전적 개념을 넘어 ‘무소유 정신’이라는 의미로 현대인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서 있는 사람들] [물소리 바람소리] [산방한담] [홀로 사는 즐거움] [아름다운 마무리] 등의 산문집과 명상집 [산에는 꽃이 피네]는 오랜 세월 변함없이 사람들의 영혼을 적시고 있다.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입적하였다.


  출처 : 인터파크 도서


댓글

  1. trackback from: 인터파크직원ㅋ의 생각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법정 저>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법정 스님 법문집 시리즈 ㅣ 법정 저 ㅣ 문학의숲 하나 속에 모두가 있고 모두 속에 하나가 있다 사람들은 번뇌 속에서 살아간다. 이 책은 번뇌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 그리고..

    답글삭제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