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 권하는 사회

드라마 <선덕여왕>은 미실의 드라마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미실은 색공으로 여러 남자를 손에 넣고 왕후가 되려 한 야심만만한 여인이다. 미실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신하를 칼로 베고 나서도 냉정을 유지하는 모습은 시청자에게 강인하게 각인되었다.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미실은 유혹하는 여자보다는 정권을 장악하려는 정치가로 그려지고 있다. 

미실은 우리 역사에서 대표적인 악녀로 꼽힌다. 악녀는 시대와 공간에 한정하지 않고,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남자를 파괴하는 여자로 통용되어 왔다. 악녀는 책과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드라마에서 악녀를 연기한 배우는 덩달아 욕을 먹었다. 그런데 악녀를 향한 시선이 지난 해부터는 눈에 띄게 변화하고 있다. 악녀 신드롬을 낳았던 드라마 <아내의 유혹>의 신애리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강한 여자로 많은 이들의 응원을 받았다. 

케이블 방송의 리얼리티 TV 프로그램 <악녀일기>도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악녀일기>에는 강남 부유층 20대가 등장해서 소비와 연애에 분방한 삶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제작진은 악녀란 惡女가 아닌 樂女, 당당하게 삶을 즐기는 여자라고 말한다. 이 프로그램은 악녀를 ‘귀엽고 개성 넘치는 여자’의 이미지로 탈바꿈하는데 일조했다. 

한편, ‘악녀란 누구인가?’라는 한 출판사의 앙케이트에는 악녀를 닮고 싶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을 표현하는 여자가 악녀라는 응답, 역사 속의 악녀들도 남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회의 편견과 맞선 여자들로 재조명해야 한다는 응답도 있었다. 또한 남을 배려하고 착하게 살아가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세상이기에 악녀가 되고 싶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최근에는 영화와 소설에서도 악녀가 등장한다. 영화 <더 리더>에서 한나는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을 가스실로 보내는 일을 맡는다. 그녀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자신의 맡은 일을 수행한다. 소설 <2백년 전 악녀일기가 발견되다>에서 14살 마리아 역시 순진한 악녀이다. 생일에 흑인 노예와 채찍을 선물 받은 마리아는 어른들이 만들어낸 관행을 의심 없이 따른다. 호기심에 노예 매매 현장에 따라가고, 노예들에게 채찍을 휘두른다. 

<2백년 전 악녀일기가 발견되다> 중에서


4. 깜짝 선물

아빠는 쟁반 뚜껑을 손수 열었다.
한 작은 게 보였다.
쟁반 안에서 몸을 잔뜩 쪼그린 채 앉아 있었다. 
그게 몸을 일으켰다.
무릎까지 오는 꼭 끼는 재킷에
엉덩이와 앞쪽을 가리는 천을 두르고 있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다.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꼬꼬란다, 아빠가 말했다.
우리 마리아에게 주는 어린 노예지.
엘리사베트 아줌마가 준 선물은 작은 채찍이었다.
채찍은 내 핸드백에 넣기에는 좀 컸다.
아쉽다.


<2백년 전 악녀일기가 발견되다>로 독일문학상을 수상한 돌프 페르로엔은 말한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꾸며 낸 인물들이다. 하지만 이야기에 나오는 일들은 모두 실제로 일어난 것들이다. 
수리남에서.
이제 나는 똑똑히 안다. 역사란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해야만 한다는 것을. 역사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마리아는 전형적인 악녀는 아니지만, 역사의식이 부족해 사회의 악을 여과 없이 실천하는 악인으로 그려졌다. 기득권의 안락한 시스템 안에서 약자를 착취하는 역사 속의 진정한 악인이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병권은 말한다. 


착하게 사는 일은 정말이지 너무나, 너무나 쉬운 일이다. 그저 모두의 생각을 따르고, 자기 시대가 옳다고 믿는 것에 충실하면 그만이다. 남들이 고개를 돌리는 일, 당신도 불편함을 느끼는 그 일, 거기서 고개를 돌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만이 우리를 사유하게 하며, 우리를 우리 시대의 허영과 어리석음, 그리고 끔찍한 악행에서 구원해준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자기 의견이 강한 여자들은 ‘악녀’로 지탄받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오히려 거친 세파를 헤쳐 나갈 강한 여자들을 요구하고 있다. 다만, 강하든 평범하든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 생각한다면, 사회악이 넘쳐나는 시스템 안에서는 언제든 진정한 악인으로 추락할 수 있다. 

댓글

  1. trackback from: Hans의 생각
    ‘악녀’ 권하는 사회 드라마 <선덕여왕>은 미실의 드라마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미실은 색공으로 여러 남자를 손에 넣고 왕후가 되려 한 야심만만한 여인이다. 미실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신하를 칼로 베고 나서도 냉정을 유지하는 모습은 시청자에게 강인하게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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