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므파탈 - 운명을 흔드는 유혹은 어디서 오는가

팜므파탈 - 운명을 흔드는 유혹은 어디서 오는가



때때로 남성에게 여성은, 혹은 여성의 강렬한 섹슈얼리티는 매혹인 동시에 강렬한 공포감을 안겨준다. 남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성적(性的) 공포심의 시원(始原)에 도대체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는 정확하게 설명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런 감정의 역사가 짧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우리 고전 <가루지기>의 여주인공 ‘옹녀’의 경우도 여러 가지 코드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원초적인 면에서 남성이 무의식적으로 여성에게 갖는 성적 공포감을 투사하고 있는 캐릭터라 할 수 있겠다.

아마 이렇게 여성의 섹슈얼리티로부터 비롯되는 매혹과 공포의 이중성은 근대예술, 특히 소설과 영화를 통해 팜므파탈(femme fatale)을 탄생시킨 가장 큰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팜므는 프랑스어로 ’여성’이며 파탈은 ’숙명적인, 운명적인’이라는 의미다. 글자 그대로 풀자면 ‘숙명적인 여인’이나 ‘운명의 여인’ 정도가 되겠다. 18세기 낭만주의 문학에서 시작되었다는 그녀들은 이후 다양한 형태의 변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다양한 변형에도 그녀들이 갖는 공통적 특징은 굉장히 ‘위험한 여성’이라는 점이다. 거부하기 힘든 매력을 갖고 남성을 좌지우지 할 뿐만 아니라 끝내 죽음이나 인격적 파멸 같은 치명적 상황으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이처럼 강력한 여성성을 부정적으로 다뤘던 것은 여성을 원천적인 ‘죄의 뿌리’로 규정했던 중세 기독교의 영향이 어느 정도 배어있는 탓이다. <창세기>에 따르면 인간을 타락시킨 것은 (사탄)이지만 그 매개물은 여성(이브)이었다. 최초의 인간(아담)을 타락시킨 죄의 매개물로서의 여성. 여성주의가 자리 잡고 남녀평등이 상식이 돼 버린 현대인(특히 현대 여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지만 불과 100여년전만 해도 앞서 근대화를 이룬 서구사회에서조차 여성이 정당한 시민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자면 남성들이 ‘자기 스스로의 욕망에 눈을 뜬’ 여성에게 갖는 공포감을 짐작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단지 그녀들은 위험할 뿐일까? 도대체 왜 남자들은 그녀들을 피해 갈 기회가 충분함에도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부나비처럼 제 발로 돌진해 가곤 하는걸까?
   


영화를 통해서 팜므파탈 전형을 시각화하는데 성공적이었던 대표적 여배우로 마들렌 디트리히를 꼽는다. 그녀는 출세작인 <푸른천사 Der Blaue Engel>(1930)에서 클럽의 매혹적인 쇼걸로 등장한다. 이 영화는 1920년대 독일을 배경으로 김나지움의 엄격한 교수가 학생들을 단속하기 위해 클럽 ‘푸른천사’에 방문했다가 미모의 클럽 쇼걸에게 매혹되서 결혼을 신청하고 학교에서 퇴출되고 쇼단의 광대로 전락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후에 만들어진 팜므파탈이 다뤄진 영화들에 비해 코미디에 가까운 스토리고 디트리히가 연기하는 쇼걸 ‘로라’ 역시 상당히 약한(?) 팜므파탈이지만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교수가 그녀에게 매혹되어 망가져가는 모습은 측은함과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느끼게 만든다. 팜므파탈이 치명적이었던 까닭은 그녀들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관능을 통해 보수화된 사회의 남성 내면에 감춰진 욕망을 일깨워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결과는 파멸과 몰락이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18세기 말 프랑스 작가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인 <위험한 관계(Liaisons dangereuses)>에 등장하는 메르테유 부인, 투르벨 부인발몽은 독특하다. 수차례 영화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당시 위선적인 상류사회의 이면에 존재했던 남녀 간의 욕망과 허영이 빚어내는 비극을 현미경 같은 시선으로 훔쳐보고 있다.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이 작품은 조선 버전인 <스캔들 - 조선남녀상열지사>(2003)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겠지만 필자가 가장 재미있게 본 것은 글렌 클로즈와 존 말코비치의 열연이 돋보였던 <위험한 관계>(1988)이다.(그들은 이 영화에서 외모를 뛰어넘는 치명적 매력을 오로지 연기를 통해 창출해내는데 완벽하게 성공했다.)

이 영화에서 전형적인 팜므파탈에 가까운 것은 메르테유 부인(글렌 클로즈)이다. 그녀는 프랑스 혁명 전야, 사치가 극에 달한 파리 사교계의 여왕으로 남편 외에 숱한 남자들을 애인으로 거느리며 군림하고 있다. 그녀가 이뤄지지 못한 첫 사랑이며 여전히 자신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 바람둥이 발몽(말코비치)에게 내기를 제안하게 되는 것도 사실 자신의 애인이 변심하고 결혼하게 된 것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 자신의 애인이 결혼 상대로 점찍은 세실(우마 서먼)을 먼저 유혹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팜프파탈의 남성버전(?)이라 할 수 있는 발몽은 세실보다는 신앙심과 정조로 무장한 투르벨 부인(미셀 파이퍼)에게 더 관심을 보인다.


발몽세실투르벨 부인을 유혹하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파멸로 종지부를 찍는다. 단지 유혹과 쾌락의 대상이었던 투르벨 부인을 진짜 사랑하게 되버렸기 때문이다. 메르테유 부인에게는 이 역시 참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이는 메르테유 부인에게 발몽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의 상실과 같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뒤늦게 찾아온 자신의 순수한 사랑을 부정하려 했던 발몽은 죽음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려 하고 메르테유 부인의 지저분한 애정행각마저 폭로해버린다.

그렇다면 이 복잡다난한 유혹과 애정행각의 드라마에서 진짜 팜므파탈이 메르테유 부인일까? 그녀는 발몽이 파멸로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듯 보이지만 세실을 유혹하라는 그녀의 제안이 직접적 원인은 아니며 실상 그녀마저도 함께 몰락해버린다. 오히려 바람둥이 발몽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주된 원인은 순결한 투르벨 부인이며 그녀와 함께 찾아온 소위 ‘순결한 사랑’이다. 우리는 사랑의 순수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에 아직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존재의 운명을 뒤흔드는 치명적 유혹은 희뿌연 담배연기 너머 보이는 디트리히의 검붉은 입술이 아닌 봄날 이른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 같은 누구일수도 있다. 당신이 만일 ’나쁜 남자’라면,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명심하라.

 

출처 : 인터파크 도서 웹진 북&

칼럼니스트 : 염신규


댓글

  1. trackback from: Hans의 생각
    팜므파탈 - 운명을 흔드는 유혹은 어디서 오는가 팜므파탈 - 운명을 흔드는 유혹은 어디서 오는가 때때로 남성에게 여성은, 혹은 여성의 강렬한 섹슈얼리티는 매혹인 동시에 강렬한 공포감을 안겨준다. 남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성적(性的) 공포심의 시원(始原)에 도대체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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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rackback from: 스타 섭외에도 전략과 전술이 있다!
    수시로 받는 문자 중에 하나가 바로 방송, 영화 제작발표회 및 각종 기자간담회, 촬영 현장 공개에 관한 공지다. 전과 달리 스타들과 ’공식적으로’ 만날 기회가 잦아졌다는 것은 반대로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특히 기자들이 좋아하는 표현인 ’단독으로’ 만날 기회는 극히 희박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스타 관련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어도 그다지 차별성이 없는 건, 다 공식적인 자리, 공식적인 멘트 일색이기 때문인 거다.  말 그대로 요즘은 스타 섭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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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rackback from: 그녀 혹은 그가 연애를 하지 못하는 몇 가지 이유 &lt;웹진 북&amp;&gt;
    사랑에 빠지는 동시에 싸이월드에 빠져버린다 <인터파크웹진> <개그 콘서트>의 ‘그냥 내비둬’라는 코너를 보면, 그렇게 날씬하지도, 그렇게 예쁘지도 않은 여자가 갖은 애교를 피우고 그 애교를 그저 사랑스럽게 바라봐주는 남자친구를 노숙자 두 사람이 비꼬면서 개그를 친다.  공공장소에서 과하게 스킨십을 하거나 끈적한 닭살행각을 풍자한 코미디로, 실제로 이런 커플들을 심심찮게 보고는 한다. 지하철이나 버스, 거리, 도서관, 영화관, 술집 등등 때와 장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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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trackback from: 여자들의 로망이 물씬 묻어나는 드라마들
    韓 <아가씨를 부탁해> vs 日 <메이의 집사> 21C 목 빼놓고 앉아서 왕자님을 기다리던 시대는 지나갔다. 여자들은 더 이상 왕자님을 기다리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공주님이 되어 왕자보다 더 멋진 집사를 거느리기를 원한다. 어찌 보면 왕자님을 구하는 것보다 왕자보다 멋지고 다재다능한 집사를 구한다는 게 더욱- 어려운 건지도 모르겠지만. 이러한 변화는 여자들이 그만큼 자신이 늘 맞춰야하고, 이해해 줘야 하는 남자가 아니라, ’자신을 배려해주고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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