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한 영웅, 죽어서 신이 되다 <인터파크웹진>

어릴 때부터 <삼국지연의>(이하 ‘삼국지’)를 무척 좋아했다. 아마 처음 이 소설을 읽은 것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던 것 같다. 물론 당시에 읽은 ’삼국지’는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는 형태와 분량으로 원작을 발췌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삼국지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 중 철저하게 유비, 관우, 장비들을 중심으로 한 에피소드가 주로 다뤄졌었고 최후에 이들이 차례로 죽고 사마의의 후계자인 사마염이 중국을 통일하는 부분은 아예 없었다. 아마 유비군이 파촉 지방으로 들어가서 촉한을 세우는 부분에서 끝냈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주인공의 실패담을 소화하기 힘든 연령대를 위한 버전이니 이해할 만도 하다.

이후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1, 2년에 한 번씩은 ‘삼국지’를 읽었던 것 같은데 지금까지 줄잡아 15회 이상은 완독했던 것 같다. 가장 많이 읽었던 버전은 집에 있었던 ‘박태원’ <삼국지>다. 정음사에서 출간했던 구보 박태원의 <삼국지>는 작가의 월북 때문에 1960년대 출판사 대표의 이름으로 발표되었고 후반부가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했었는데 최근에서야 완벽한 모습으로 재출간 되었다. 최근 버전은 박태원이 북에 가서 1960년대 중반에 완결한 판본이라고 한다. 그 다음으로 많이 읽은 것은 ‘이문열’<삼국지>다. 그 어느 ‘삼국지’보다도 작가의 해석이 많이 들어간 판본인데 이 때문에 독자들의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버전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 주요한 ‘삼국지’들은 대부분 읽어본 것 같다. 이중 가장 극단적으로 독창적 관점을 드러낸 작품은 교포작가 故 이학인이 스토리를 쓰고 중국계 만화가 왕흔태가 그린 일본만화 <창천항로>다. 아무리 다양한 ‘삼국지’ 판본이 있어도 기본적으로 유비와 촉한을 중심으로 한 나관중의 설정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데 이 작품은 노골적으로 조조 중심으로 스토리를 끌고가며 10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는 등 크게 화제를 모았다.

삼국지


여하간 오랫동안 ‘삼국지’를 읽다보니 사랑하는 캐릭터도 계속 바뀌는 것 같다. 다뤄지는 시간도 방대하고 등장하는 인물로 엄청나게 많은 그야말로 ‘대하소설’이니 당연하겠지만 각 장마다 매력적으로 어필하는 인물들이 계속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삼국지’에서 두드러지는 단 한명의 주인공을 찾기는 어렵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뭐 일단 유비가 거병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하는 만큼 유비를 주인공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비는 압도적 주인공으로 보기에는 능력이나 카리스마가 많이 떨어지며 타인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소설 중반부까지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압도적 무력을 보여주는 의형제 관우, 장비에게 의존하고 있고 이후로는 탁월한 지략의 소유자인 제갈량 의존도가 너무 높다. 심지어 ‘적로’와 관련된 에피소드에서는 ‘재수 없는’ 말(馬)까지 그를 돕지 않는가.

덕분에 많은 ‘삼국지’ 캐릭터들이 인기를 앞다투어 다투고 있지만 그중 역대 단연 1위는 관우다. 심지어 실제 관우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 국경 넘어 우리나라와 일본에 까지 지어졌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야말로 죽어서 신이 된 인기를 누가 당해내랴. 정사에서 관우의 역할이 조조에는 아예 비할 바가 아니며 유비에 비해서도 훨씬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렇게 분에 넘치는 인기를 오랜 세월 누리고 있는 것은 소설에서 그의 모습이 누구보다도 고전적인 영웅상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 있기 때문이다.

삼국지관우


일단 첫 번째 고전적 영웅의 조건은 탁월한 능력이다. 관우 역시도 마찬가지다. 코에이사에서 발매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덕분에 인터넷 서핑 중에 심심치 않게 ‘삼국지’ 등장인물의 능력치에 대해 비교하는 이들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한 캐릭터를 무력, 통솔, 지력, 정치, 매력 같은 수치로 따져보는 것인데 관우는 이런 점에서 소설에서 만큼은 가장 완벽한 장수라 할 수 있다. 무력이란 측면만 놓고 보면 유비, 관우, 장비가 한꺼번에 덤벼도 이겨내지 못한 일당백 여포가 최강이라 할 수 있겠지만 여포는 자신의 무력을 과신하다가 상대의 전략에 잘 걸려드는 오만함과 어리석음 때문에 낮게 평가된다. 게다가 주군을 두 번이나 배신하고 살해하는 신뢰도 제로의 행동 때문에 결정적으로 점수를 잃는다. 그에 비해 고전 <춘추좌씨전>을 끼고 사는 것으로 묘사된 관우는 여포를 제외하면 최강 무인이면서도 유교적 지성인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 또한 당대의 최고 세력가 조조의 엄청난 사랑을 받음에도 주군인 유비에게 돌아가는 의리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뭐하나 빠지는 바가 없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렇지만 관우의 영웅적 특징에서 탁월한 능력은 기본 전제일 뿐이다. 사실 능력으로만 치자면 소설 안에서 그에 버금가는 인물이 꽤 많다. 우선 부정적으로 묘사되었으나 전쟁과 정치에 모두 능하며 문학적 재주도 탁월한 올라운드 플레이어 조조가 소설 전반부의 ‘사기성’ 캐릭터라면 신기에 가까운 전략전술에 심지어 비바람까지 불러내는 제갈량은 후반부의 ‘사기’ 캐릭터다. 여기에 제갈량의 숙명적 라이벌인 주유나 맨손으로 나라를 세운 것이나 다름없는 강동의 소패왕 손책, 거의 조조를 죽이기 직전까지 밀어붙인 서량의 젊은 야수 마초 등도 소설에서의 능력만큼은 절대 관우에 뒤지지 않는다. 얼음 같은 냉정함으로 패전을 거의 안하는 조운과 파촉 공략에서 절대적 공훈을 세운 장비라는 강력한 팀내 라이벌(?)도 빼놓을 수 없다. 군웅소설의 특징상 ‘삼국지’의 주요 인물들의 개인적 탁월함은 모두 과장적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관우의 영웅성이 잘 해독되지 않는다.

관우가 고전영웅의 전형으로 오래 사랑받는 이유는 그가 소설 안의 그 누구보다도 영웅서사의 기승전결을 가장 충실하게 갖춘 인물이라는 점에서 찾아야 한다. 우선 출신부터 그렇다. 고전영웅의 전제조건 중 하나는 주인공의 출발지점이 외관상 미미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아더왕도 그렇고 한국의 홍길동도 그렇다. 심지어 농부의 아들인 슈퍼맨도 그렇다. 물론 그들의 혈관에 흐르는 핏줄을 고귀한 것일지 몰라도 출발하는 지점에서는 보잘 것 없어야 한다. 그래야 대중들이 동질감을 느끼며 스스로 심적 투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관우는 출신 성분이 ‘삼국지’ 등장인물 중 가장 떨어진다. ‘삼국지’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등장할 때 ‘누구의 자손이고 어릴 때 뭘 했고’하는 식의 묘사가 있는데 비해 관우는 판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조상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으며 오직 젊어서 나쁜 사람을 죽이고 고향을 등졌으며 당대의 명사 노식을 찾아가 <춘추좌씨전>에 대해 물었다는 언급이 나올 뿐이다. 종합해 보자면 그는 ‘백퍼센트’ 평민 출신이라는 것이다. 돗자리 장수 유비도 황실의 후손이고 가장 민중적 면모를 강하게 드러내는 장비마저 연나라 명문 귀족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판에 관우는 그런 것이 일절 없다. 그는 일체의 혈연, 지연 없이 오직 자신의 능력으로 크게 성장한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앞서 언급한 여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여포 역시 출신이 불분명하게 묘사되고 있으며 그 덕분에 끊임없이 한족이 아닌 이민족 출신일 거라는 의심을 받는 캐릭터다. 게다가 관우가 황실 후손인 유비와 의형제를 맺었고 여포는 출신 지역의 세력가인 정원과 의부자 관계를 맺었다는 점도 유사하다. 그런데 일단 세상에 두각을 나타낸 이후 둘은 결정적 차이가 있다. 바로 인격적 고결함의 유무다. 일종의 ‘의사 혈연 관계’를 통해 비천한 신분에서 상승했다는 점은 유사한데 이후 둘의 행로가 완전히 달라진다. 관우는 유비가 패전을 거듭하는 상황에서도 의리와 충성을 다하는데 비해 여포는 자신의 의부인 작은 지방세력가(정원)가 더 큰 세력자(동탁)와 대립하자 본래 자신의 의부를 죽이고 더 큰 세력가와 다시 의부자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결국 동탁마저도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죽인다. 관우를 움직이는 동력이 대의와 명분이라면 여포를 움직이는 힘은 철저히 이기적 욕구다.

삼국지여포


이것이 둘의 최후를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포나 관우의 최후가 적의 무력이 아닌 전략에 의해, 그것도 부하들의 배신이 동반되면서 패전하고 죽음을 맞는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특히 자신의 능력을 과신에서 비롯된 오만함과 독선이 그들을 몰락시키는 이유라는 점에서 그렇다. 자수성가한 천재들이 상당수 그렇듯 이들은 상당히 오만한데 작가가 매우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는 관우도 이 점에서는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 관우의 오만이 드러나는 대표적 에피소드로 오왕인 손권이 사돈을 맺자는 제안에 대해 “범의 딸을 어찌 개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겠는가!”라고 일갈하는 부분이나 적장 육손을 하룻강아지 취급하다가 결국 패전에 이르는 부분을 많이 꼽는다. 조조군의 명장 우금이나 방덕에 대해서 “그 더벅머리 녀석들이 뭘 할 수 있겠어?”라고 빈정대는 부분이나 무명의 황충이 자신과 함께 오호대장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불같이 화내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그가 비록 순직한 의리의 사나이지만 완전무결한 이는 아니다.

하지만 관우의 오만이 여포의 오만과 다른 것은 그 오만마저도 인격적 고결함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여포의 오만불손이 주로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향하고 있는데 비해서 관우의 오만은 오히려 자기와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자기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을 향해 있었다. 일국의 장수가 적국 왕의 사돈 제안을 거절할 때 범과 개의 비유를 쓴다는 것은 지독한 오만함이면서도 듣는 이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간지’가 있다. 겨우 스스로 황제를 칭했을 따름인 원술과 사돈을 맺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여포에게는 결코 그런 ‘간지’를 찾기 힘들다. 그저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기적 천둥벌거숭이의 잘난 척일 따름이다.

따지고 보면 자신을 당대 최강의 무장으로 사랑하는 권력자 조조의 호의를 버리고 망해가는 주인을 쫓아가는 관우의 의리야 말로 그의 오만함 중 극치일 것이다. 관우는 속으로 ‘난 스스로의 힘으로 당신보다 못난 우리 주인을 성공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을 런지도 모른다. 사실 바로 그 순간 그의 비극적 운명이 정해진 셈이다. 그러나 이것을 관우의 흠이라고 해야 할까? 오히려 이 고결할 정도로 드높은 오만함과 그로 말미암은 비극적 최후로 인해 관우는 시대를 초월하는 영웅의 전형으로 완성된다.

출처 : 인터파크 도서 웹진
북 &임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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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trackback from: Hans의 생각
    오만한 영웅, 죽어서 신이 되다 어릴 때부터 <삼국지연의>(이하 ‘삼국지’)를 무척 좋아했다. 아마 처음 이 소설을 읽은 것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던 것 같다. 물론 당시에 읽은 ’삼국지’는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는 형태와 분량으로 원작을 발췌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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